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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밀레의 '이삭 줍기'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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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이삭 줍기'는 장프랑수아 밀레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1857년 완성되었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은 땅에서 무언가를 줍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남자들이 보이고 주위에는 산더미처럼 쌓은 밀이 보입니다. 여인들은 이미 수확한 밀을 두고 떨어진 이삭을 왜 줍고 있는 걸까요?

이삭 줍기

> 이삭 줍기

그림 속 여인들은 집안에 남자가 없거나 병환으로 일을 할 수 없는 가난한 여성들입니다. 일을 할 수 없어 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라도 먹고살아야 했고 이를 딱하게 여긴 밭의 주인은 떨어진 이삭을 일부러 줍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림에서 비춰지는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이삭 줍기'는 단순히 농촌의 실상을 그린 그림은 아닙니다. 그림은 구역 성경에 나오는 룻기의 스토리가 모티브입니다. 남편과 사별한 가난한 팔레스타인 여인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이삭을 주워 겨우 먹고살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누구에게나 떨어진 보리 이삭을 주울 수 있는 법이 있어 밀레는 그 스토리를 화폭이 담은 것일 뿐 농촌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농민화이면서 종교적인 관점의 역사화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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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는 농민 화가가 아니다?

밀레는 농민 화가라 불리지만 농민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은 화폭에 담기 위해 노력한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촌의 풍경을 담으며 자신이 꿈꾸던 역사화가로 이름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노르망디의 부유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아버지가 극구 반대한 파리 미술 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학교에 들어간 밀레는 역사화가로 유명한 들라로슈의 제자가 되며 자연스럽게 역사화가의 꿈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술 학생들의 등용문인 로마 대상에서 번번이 실패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역사화가의 꿈을 품은 채 생계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갑니다.

 

초상화로 번 돈으로 틈틈히 역사화를 그렸지만 인기는 시들했고 또다시 돈벌이를 위해 누드화를 그립니다. 하지만 누드화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면서 자신의 꿈인 역사화에 집중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당시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활동하던 곳으로 이주해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34살이 된 밀레는 '키질하는 농부'라는 그림을 출품하게 되는데 국가에서 그에게 그림을 주문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그림이 성공을 거둔 이유에는 역사적인 프랑스혁명과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부르주아들이 이끈 7월 혁명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2월 혁명에 의해 무너졌고 이 때 밀레의 '키질하는 농부'가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또, 그림 속 농부의 차림새는 프랑스 국기를 3가지 색이 쓰여지면서 혁명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때부터 역사화가가 되고 싶은 밀레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에 의해 농민 화가라 불러지게 됩니다.

키질하는 농부

> '이삭 줍기'는 정치적인 그림이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정권이 들어오며 나폴레옹 3세가 왕정을 이끌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밀레의 그림을 보고 이삭을 줍는 사람은 폭도를 일으킨 주범, 건달이라 칭하며 밀레에게는 사회주의자라며 비판을 했습니다. 그는 여론과 정치적인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룻기가 이삭을 줍는 역사 속 배경을 이미화해 '이삭 줍기'라는 제목으로 역사화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의 평생소원이던 역사화가의 꿈도 이루고 정치적인 오해도 풀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제목이었습니다. 하지만 밀레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농민 화가로 불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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