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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림 속 상징과 의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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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카소, 현대 예술의 악동, 천재 예술가, 예술계의 제임스 딘의 수식어를 단 아티스트는 바로 장 미셸 바스키아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재능으로 붙여진 별칭을 가진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요절한 현대 예술가입니다. 밤벼락을 캔버스 삼아 낙서를 한 듯한 선들과 강하고 분명한 색감 등의 독특한 화풍으로 27살이라는 나이에 사망하기 전까지 무려 25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순수함을 담은 폭력, 죽음을 담은 생명이라 표현을 했고 그것은 그가 그림 속에 남긴 독창적인 상징과 기호 등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상징과 기호는 삶과 죽음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그만의 화풍이 되었습니다.

> 바스키아를 상징하는 기호와 의미

바스키아는 끊임없이 그림의 소재를 찾아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전에 그렸던 그림들의 오브제를 다시 발췌해 새로운 이미지와 결합시켜 또 다른 작품을 창출하는데 능숙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작품에는 반복적으로 보이는 상징들이 있고 그것이 기호이며 그 기호는 그의 생각과 삶의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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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

해골은 바스키아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뉴욕 중산층 가정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8살이 된 어느날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바스키아는 어머니가 두고 간 해부학 책을 유연히 보았고 책 속의 인체 장기가 뼈에 흥미를 갖고 빠져들게 됩니다. 인체의 해부는 바스키아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됩니다.

바스키아는 그림 속에 해골을 비롯한 뼈와 장기들을 소재로 특유의 토속적인 느낌으로 표현합니다. 인체의 해부는 곧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어졌는데 그는 죽음이 주는 공포와 슬픔, 무거운 느낌은 해학적이고 경쾌하게 해석합니다.

<만화>

바스키아는 어릴 적 취미는 만화였습니다. 만화 보는 것이 좋았던 그는 어릴적 꿈이 만화가였습니다. 이후 만화는 그의 작품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스키아 그림의 낙서와 글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만화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만화적인 화풍을 당시 미국 사회를 의미하는 단어와 글귀를 써 이목을 집중지시기도 했는데 대부분 사회적인 문제와 이슈, 저항 정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저작권>

바스키아는 17살이 되던 해 학교를 자퇴를 하는 바람에 집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학교 대신 대안 학교에 들어가 친구들과 티셔츠와 엽서를 팔며 생계를 꾸려 갔고 그러던 중 낙서 화가 알 디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세계를 공감하며 'SAMO'를 결성합니다.  'SAMO'는 SAme Old Shit의 줄임말로 그게 그거, 흔에 빠진 것의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SAMO'는 뉴욕 담벼락에 반항적인 문구와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활동하던 1970~80년대에는 비주류 정서가 트렌드였는데 이것과 맞물려 그의 예술 활동은 뉴욕 시민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자 바스키아는 자신의 그림에 저작권을 뜻하는 상징적인 문구를 새겨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권위, 자부심을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SAMO'는 유명해지고 싶었던 바스키아와 익명의 화가로만 남고 싶은 알 디아스와 의견이 갈라지면서 해체됩니다.

<왕관>

'SAMO'가 해체되고 다시 솔로가 된 바스키아는 제법 알려진 아티스트가 되었고 키스 헤링, 케니 샤프팝 등 예술가들과 사귀게 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길거리 화가였습니다. 그리고 바스키아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바로 앤디 워홀입니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자신의 재력과 마케팅을 동원해 그를 전폭 지지해 순식간에 유명한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유명해지고 싶었던 바스키아의 꿈이 앤디 워홀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이 무렵 바스키아는 초상화에 집중합니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재즈 아티스트, 복싱 선수, 인권 운동가 등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이었습니다. 바스키아도 예술계에 처음 등장한 흑인 아티스트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인종 차별,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웅이고 존경한다는 의미로 초상화 위에는 왕관을 상징적으로 그려 넣습니다. 그리고 왕관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과 귄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바스키아는 다양한 기호와 상징으로 만화같이 그려진 그림에는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 영웅, 죽음 등을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유니크한 작품에 매료되었고 198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자리 잡습니다. 

앤디 워홀의 도움으로 유명한 예술가의 꿈을 이룬 바스키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명세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사회는 바스키아와 워홀의 관계를 의심했고 공공연하게 이슈화했습니다. 설상가상 바스키아와 워홀이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까지 실패로 끝나며 두 사람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1987년 워홀이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바스키아는 큰 상실감으로 약물 중독에 빠졌고 워홀이 사망한 1년 뒤 바스키아도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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